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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Marketing Agent

대행사의 비딩, 위기는 언제나 익숙치 않다

제안 수주에 목이 말랐다. 지난해 준비했던 제안들이 줄줄이 물을 들이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갈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 거기에 당연히 연장될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의외로 드롭되면서 큰 덩어리가 빠지게 되었다. 그만큼의 비용을 감당해 줄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필요했던 인력을 유지시키는 명분도 함께 사라져서 최악의 경우 부서장에게 살생부(?)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닥쳤다.

 

비딩에서 실패하면 업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온다 Photo by Steven Spassov on Unsplash

연봉협상을 앞둔 상황이라 더 조급했을 것이다. 현재 계약기간이 남아있거나 연장 제안에 성공한 프로젝트의 비용을 다 더하더라도 월 1,000~2,000만 원 규모의 프로젝트 3~4개가 더 필요했고, 내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평균 단가가 월 1,000만 원 규모임을 감안했을 때, 월 6,000만 원 정도의 추가로 수주해야 했다. 그 정도의 규모를 만들어 놓아야 지금까지 함께 호흡을 맞춰온 팀원의 고용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작은 대행사의 흔한 위기다. 이것은 숙명인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기본 생리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는 보통 10월부터 제안으로 바쁜 시기에 접어든다. 다양한 형태의 모처의 에이전시들처럼 10월부터 신규, 연장 제안으로 업무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하고 무장을 단단히 한다. 그 해 첫 제안은 중고차 서비스로 렌털 업계에서 인지도 있는 모기업이었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잘되면 타 계열 브랜드까지 확장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발주사 실무진과의 사전 컨설팅 미팅에서 디지털 PR의 트렌드와 방향성에 대해 공유하고 실무진과 에이전시가 방문해 주셨음에, 초대해 주셨음에 서로 감사하며 좋은 느낌으로 미팅을 마무리했다.

 

언제나 그렇듯 RFP(Request For Proposal : 제안요청서)를 받고 팩트체크를 진행했다. 현재 주변 상황들과 기업의 경쟁 상황 등과 심지어 함께 참여하는 경쟁 에이전시 대비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장단점을 분석하고, 분석을 기반 삼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스펙으로 제안을 준비한다. 그러나 제안 결과는 참담했다. 우선협상대상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가 제시한 비용 때문이었다.

 

업체 실무진과의 사전 미팅에서 느꼈던 좋은 분위기와 감정들은 의사결정권자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실무진이 그리는 그림에 맞추고, 큰 방향성과 세부적인 실행력을 기반으로 제안을 준비해 가지만 실무진이 의사결정권자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 제안은 결국 선택되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전략 제안을 진행하면서 실패한 케이스의 대부분은 실무진은 마음에 들었으나 소위 '윗선'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몇 주 동안 준비한 제안서는 허무하게 버려진다. 가장 짜증 나는 부분이지만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대행사의 무기력함은 바로 여기서 오게 된다.

 

리젝션 피(Rejection fee), 먹는 건가요?

외국에서는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있다는 리젝션 피, 우리말로 하면 '제안 참여 보상금' 정도가 되겠다. 제안에 수주하지 못했을 때 소정의 사례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지난해 어느 홍보대행사 직원이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은 많은 호응은 얻어내지 못했지만 많은 대행사 직원들의 공감을 산 바 있다. 광고든, 홍보든, 디지털이든 대행사의 기본 생리는 비슷하기 때문에 나 역시 격하게 공감했고, 서명했고, 퍼 날랐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 광고, 홍보 등 PR 업계의 리젝션 피 제도가 시급합니다)

 

그렇게 퍼 날랐는데 고작 10,000명이라니... 팀장들만 서명한 것인가

예를 들어 짧은 시간에 동영상을 직접 제작해 오는 대행사와 아이디어를 콘티로 그려서 제출하는 각각의 대행사가 있다고 치자. 아이디어 수준, 업계 경험, 담당인력 구성, 유사 프로젝트 레퍼런스 등이 비슷하다는 조건에서라면 당연히 직접 제작해서 오는 대행사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러분 한 번 상상해보세요. 이런 아이디어의 콘텐츠를 우리가 제작한다니!' 보다 '이런 영상이 연간 최소 24개가 당신의 유튜브 채널에 진행될 겁니다' 식의 콘텐츠 가시화가 더 먹히는 것. 그러니 대행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제안 준비에 최소 몇십, 몇백 만원을 들여 준비하는 수밖에. 안타깝게 1~2점 평가점수로 떨어진 2등 업체는 본전 생각이 안 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비딩 시스템 자체가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이미 업계 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만 관행은 바꾸기 쉽지 않다. 그래서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들이 영상 제작이나 플랫폼 구축으로 스펙트럼을 넓혀 경쟁력을 높이거나 자신 있는 분야의 버티컬 미디어를 만들어 역량을 강화한다. '위기탈출 넘버원'이 아니라 '넘버원 만 위기탈출'하는 에이전시의 확률 게임. 지금 쓰고 있는 제안서는 또 무슨 변수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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